산으로 돌아온 화가, 유영국
평일 낮 시간임에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시장 입구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거장의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이 미술관을 메운 관람객들의 진지한 발걸음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번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최되는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는 그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작 15점을 포함해 유영국의 전 생애를 폭넓게 조망한다. 유화 115점을 필두로 평생의 궤적이 담긴 170여 점의 방대한 작품과 아카이브가 전시장 내부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의 회고전을 별도의 비용 없이 관람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번 전시의 큰 장점이다.

문을 열고 전시장 내부로 들어서면 유영국의 1960년대 대작이자 대표작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으나 생각외로 혼잡하지 않았다. 캔버스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뿜어내는 아우라가 워낙 엄청났기에, 관람객들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치거나 몰리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와 긴밀히 조우하고 있었다. 거장이 구축한 위엄있는 파동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동선을 변주해가며 감상에 몰입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적 경험이었다.

1. 1950년대의 생업 vs 1960년대 '전업 화가'로의 귀환
전시장 가득한 이 에너지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두 시기, 즉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상관관계를 짚어보아야 한다.
공인된 연보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인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유영국은 고향 울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양조장을 운영했다. 그는 사업가로서도 매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집안의 경제적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많은 화가가 생계를 위해 화단의 유행을 쫓거나 상업적 판매 압력에 타협할 때, 유영국이 스스로 구축한 경제적 자립은 그가 화단의 유행이나 판매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평적으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가 사업가로서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나이 마흔 무렵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제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전업 화가로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닌, 오직 내면의 예술적 열망과 창작의 본질을 따르기 위해 선택한 귀환이었다.
이 타협 없는 성정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그가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업 화가의 길을 걸으며 엄청난 작업량을 쏟어낸 1960년대 전성기 작품들은 화단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독창적인 한국적 기하학적 추상의 정점을 보여준다.
2. 기하학적 부조, 전위적 실험의 흔적
전시 동선은 60년대 대작 섹션에서 공간의 리듬을 바꾸며, 유영국의 청년기 전위적 실험을 증명하는 사진과 부조 작품 섹션으로 이어진다. 기하학적인 선을 조합한 회화와 초기 오브제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 협회상 수상작 《작품(Work R3)》의 실물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자유로운 유기적 곡선과 높낮이가 다른 합판 면들이 자아내는 입체적 레이어는 청년 유영국의 감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오늘날의 관람객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구상화만이 익숙하던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과감한 도전이자 용감한 실험작임을 목격할 수 있다.
다만, 이 기념비적인 부조 작품이 벽면에 걸리지 않고 다른 실험작들과 함께 유리 진열장 안에 비스듬히 눕혀져 전시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단의 조명이 진열장 유리면에 반사되어 시야를 방해하는 데다, 관람객이 비스듬한 각도로만 작품을 내려다보아야 하기에 부조 특유의 정면성과 단차가 만드는 미세한 그림자의 선을 온전히 감상하기 어려웠다. 벽면에 독립적으로 배치하여 관람객이 원근을 조절해가며 조형적 긴장감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획했더라면 청년기의 실험 정신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 1958년작 《봄비》, 일시 정지된 찰나의 에너지
이 아쉬움은 다음 섹션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경외감으로 바뀐다. 사방이 차단된 블랙 큐브 안에서, 한 점 한 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의 작품들은 마치 각기 다른 크기의 고해상도 액정 화면을 설치해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화면 내부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을 연상시킬 만큼 격렬하며, 우주의 가장 역동적인 절정의 순간을 단숨에 일시정지시킨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대담하고 거대한 구도 속에서도, 면을 세밀하게 채워 나간 생생한 붓터치의 마티에르(질감)와 깊이있는 색감은 관람객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 둔다.

특히 1958년 작 《봄비》 앞에서는 한참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설명이 요구되는 그림은 이미 그림이 아니고 군더더기다." (1979)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 유영국은 그림에 어떠한 문학적 설명도 덧붙이기를 거부했다. 대다수의 작품에 주관적인 설명이나 감정적 제목을 붙이지 않고 《작품(Work)》이라는 명제를 고수했던 유영국의 연보에서, 《봄비》처럼 특정 사물이나 계절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제목이 붙은 작품들을 이 섹션에서 볼 수 있다.
어두운 전시 공간 속《봄비》는 텍스트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지에 떨어지는 청각적인 빗소리와 생명이 움트는 시각적 파동을 온전히 전하고 있었다. 차가운 이성의 골격 위에 서정의 극치를 얹어낸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던 나만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이다. 설명을 거부했던 화가가 남긴 그림 앞에서 오히려 가장 선명한 감각의 언어가 들려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4. 원색의 산, 그리고 거장의 고백

어두운 방을 빠져나와 다시 환한 화이트 큐브로 진입하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원색의 '산' 연작이 이중 벽으로 둘러찬 공간에서 쉬어갈 틈조차 주지 않고 거대한 행렬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겹겹이 둘러찬 산세를 보는 듯하다. 적색, 녹색, 오렌지색, 보라색, 청색 등 한국 전통의 오방색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원색의 추상화들은 관람객을 말 그대로 압도한다.
유영국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자유로운 형태의 행렬에 넋을 잃고 걷다 보면, 중첩되는 강렬한 색상 속에서 이 수많은 그림이 단 하나도 겹치지 않는 '모두 다른 형상의 산'이라는 사실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산의 거대한 기운이 작가의 주관적 색채와 어우러져 화면 위로 용솟음치는 그 길목은 전시의 시각적 절정을 이룬다.
이 압도적인 경험의 비밀은 전시의 마지막 섹션에 마련된 아카이브 영상 자료, 특히 유영국 화백의 딸(유자야)의 언론 인터뷰 고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버지께 ‘왜 산을 그리세요’ 여쭤본 적이 있다. 그때 하신 얘기다. 피카소 같은 사람은 워낙 천재라서 뭘 그려도 다 잘 그리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그래서 고향 울진의 산을 평생 그리셨다. '산에는 무엇이든 다 있다'고 하셨다. '산은 항상 같은 것 같지만 항상 다르다'..."
실제로 전시장에 걸린 수십 점의 산을 보고 나면, 그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의 창작 원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같은 산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어쩌면 유영국이 평생 산을 그린 이유는 산이 익숙해서가 아니라, 끝내 다 그릴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장의 이토록 겸손하면서도 단단한 고백은 원색의 산으로 가득 찬 전시실을 걸어 나올 때의 생생한 전율을 완벽하게 설명해 준다. 심각한 심근경색으로 병석에 누워 생활해야 했던 말년의 투병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가 왜 평생 50-100호가 넘는 대작들을 고집스럽게 그려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고향 울진의 거대한 산세와 그 안에 내포된 대자연의 숭고한 에너지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는 캔버스의 크기 또한 그만큼 거대하고 웅장해야만 했을 것이다.
5. 아트 굿즈로 확장된 거장의 미학: '나는 산 안에 있다'

전시장을 나선 관람객을 맞이하는 미술관 아트숍의 구성 또한 여타 전시와는 궤를 달리한다. 도판을 단순 복제한 흔한 기념품을 넘어, 유영국의 시그니처인 '원색'과 '조형'의 미학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작가의 강렬한 색채 배합을 그대로 구현한 컬러밤 세트와 아트 코스메틱은 '가장 뜨거운 한국적 색채'를 사용하는 유영국의 예술성을 일상의 뷰티 영역으로 기발하게 확장한 시도로 읽힌다.
벽걸이 거울 하단에 유영국의 조형적인 산 이미지를 결합한 아트 굿즈인 '유영국 아트 미러'가 기억에 남는다. 유영국의 산 이미지로 거울하단을 장식한 이 상품에 붙여진 제목은 '나는 산 안에 있다'이다. 이번 전시의 대명제인 《산은 내 안에 있다》를 위트 있게 뒤집은 이 제목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외면을 비추는 동시에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단단한 산을 포착하게 만든다. 거장의 예술적 철학을 일상적 소품 속에 녹여낸, 인상적인 시각적 마침표이다.
📋 직접 걸어본 전시장 관람 노트
| 전시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
| 전시 기간 | 2026.05.19 ~ 2026.10.25 |
| 관람 요금 | 무료 (예약 없이 입장 가능) |
| 추천 관람 시간 | 약 2시간 (출품작 170여 점 대규모 전시) |
| 관람 밀도 | 평일 낮에도 관람객 많은 편 |
| 꼭 볼 작품 | 'Work R3', '봄비', 원색의 산 연작 |
| 오디오 가이드 | 현장 대여 4,000원 |
| 굿즈 포인트 | 컬러밤·아트 미러 등 100여 종 굿즈 |
| 교통 | 시청역·서대문역 도보권 |
| 주차 | 공간 협소, 대중교통 권장 |
🎨 유영국 이해하기 시리즈
1편|전시 소개
👉 유영국 회고전 프리뷰
2편|대표작 줌인
👉 대표작으로 읽는 유영국 (현재글)
3편|시장 읽기
👉 블루칩 작가 유영국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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