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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전시 후기 ㅣ 한국 작가들이 다시 쓴 큐비즘

by artstrollnote 2026. 6. 26.

피카소를 본 한국 미술, 마지막 전시실에서 완성되는 큐비즘의 여정

큐비스트전 전시장 입구 전경 - ArtStrollNote
《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 전시회 입구 전경

 

여의도 63빌딩에 상륙한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전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이 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가 자랑하는 피카소, 브라크, 레제 등 서양 현대 미술 거장들의 원작 91점을 포함한 총 112점이 대거 서울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람객이 서양 거장들의 화려한 대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으로 모여들지만, 예상 밖의 백미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숨겨진 명작 21점을 모아놓은 'KOREA FOCUS(한국 포커스)' 섹션이다.

 

"먼 유럽에서 건너온 아방가르드 실험이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거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따뜻한 서정과 묵직한 시대정신으로 번역되었을까?"

 

서양의 유행을 단순히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언어로 위대한 예술을 피워낸 한국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1. 'KOREA FOCUS(한국 포커스)', 평범한 공간이 만든 가장 큰 반전

이 감동적인 방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아쉬움이 있다. 앞선 전시실들이 보여준 개방감 넘치고 쾌적한 구조와 달리, 2층에 마련된 한국 작가 섹션의 공간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소 평이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타 전시관과 차별된 공간과 작품연출에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섰건만, 다소 실망스러웠다. 사실 이전 전시실을 감상한 직후의 높은 기대 탓에 상대적인 실망감이었음을 인정한다.

 

천고(천장 높이)는 이전 전시실에 비해 눈에 띄게 낮아졌고, 구조 역시 여느 일반 전시장과 별다른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아 물리적인 공간이 주는 감동은 잠시 주춤한다. 서양 거장들에게 할애된 공간에 비해 한국 거장들의 무대가 다소 단조롭게 연출된 듯한 인상도 남는다.

 

그러나 이 평범하고 갇힌 듯한 공간은 역설적이게도 각 작품 자체에만 온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반전의 계기가 된다. 공간이 주는 화려한 후광이 사라진 자리, 오직 벽에 걸린 캔버스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국 작가들의 내공이 서구의 대작들을 압도하며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차가운 도구를 따뜻한 서정으로 바꾼 김환기와 유영국

서양화가였던 김환기와 유영국은 서구의 입체주의를 접하고 대상을 면으로 나누는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돈해 놓은 화면 속에는 서양 미술 특유의 거친 파괴가 없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가 정리한 면들 속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달항아리와 둥근 달, 낮게 누운 산과 푸른 하늘의 서정성이 가득 고여 있었다. 서양의 날카로운 기하학을 가져와 한국의 부드러운 곡선을 빚어낸 셈이다.

 

한국적 자연의 장엄함을 평생 그렸던 유영국 역시 산과 나무를 차가운 삼각형과 사각형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 고요한 틀 안에 설악산이나 지리산의 사계절이 품은 강렬한 색채를 채워 넣으며 차가운 면 분할 뜨거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3. 박래현, 한국화의 평면성으로 완성한 한국적 큐비즘

노점, 박래현 作 - ArtStrollNote
박래현, 《노점》, 1956, 종이에 먹과 색,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전통 한국화의 재료인 먹과 색을 사용하여 시장 여인들과 배경의 건물을 감각적인 선과 평면으로 구성한 박래현의 대표작)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은 당시 화단에서 홀로 독창적인 길을 걸었던 한국화가 우향 박래현이다.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두껍게 쌓아 올리던 서양화가들과 달리, 박래현은 평생 다루어온 한지와 붓, 그리고 먹과 채색을 가지고 입체주의를 실험했다.

 

사실 전통 한국화는 서양화처럼 착시를 일으킬 만큼 사물을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그리기보다 평면적으로 담아내는 데 익숙했고, 화가의 시선이 이동하며 바라본 여러 각도의 모습을 한 화면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특징이 있었다. 입체주의 역시 여러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공존시키는 조형 언어였기에, 박래현에게는 이미 익숙한 전통의 감각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이정표였다.

 

전시장에 걸린 그의 대표작 《노점》(1956)을 보면 이러한 화가의 고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인들 뒤로 보이는 건물들은 사각형의 면과 선으로 깔끔하게 나뉘어 기하학적인 평면 구성을 정돈되게 보여준다. 전면에 자리한 다섯 명의 여인들은 어딘가 서양 입체주의의 출발점이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시키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박래현은 서양화처럼 빛과 어둠을 이용한 명암 처리를 과감히 지워내고 대상을 과격하게 해체하는 대신 담백하고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들을 담아냈다. 구체적인 형태를 덜어낸 은은한 색면들이 인물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흰색과 검은색의 윤곽선을 적절히 섞어 세밀한 형태를 잡아내며 부분적인 음영 효과를 살렸다. 서양의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우리가 가진 한국화의 매력 속으로 입체주의의 선과 구성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한국화가로서 그만의 개성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4. 이수억, 전쟁의 기록을 담아낸 입체주의

큐비스트전 코리아포커스 전시실, 6.25 동란, 이수억 作 -ArtStrollNote
이수억, 《6.25 동란》, 1954, 캔버스에 유채, 가나문화재단 소장. (우측 이미지. 전쟁 직후 피난길에 오른 가족의 행렬을 단순화된 덩어리감과 단단한 구도로 표현하여 묵직한 인상을 주는 대표작)

 

 

 

박래현이 한국화의 담백한 수묵담채화 기법으로 서양의 사조를 부드럽게 소화했다면, 서양화가 이수억은 입체주의가 가진 구조적인 선과 면을 가져와 우리가 겪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을 기록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대표작 《6.25 동란》(1954)은 전쟁의 화마 속에서 리어카에 피난 짐을 싣고 길을 떠나는 가족의 행렬을 보여준다. 그림 속 인간과 사물들은 거칠게 깨진 조각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세밀 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단순화한 덩어리감만이 느껴지는 풍화된 석조상을 연상시킨다.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방향으로 힘겹게, 무겁고 지친 발걸음을 떼는 얼굴 없는 익명의 인물들은, 전쟁 직후의 힘겨운 시대를 묵묵히 버텨내야 했던 우리 모두의 일상과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수억은 입체주의의 특징인 다시점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과하게 해체하지 않았다. 대신 기하학적인 선과 면을 배경에 안정감 있게 배치하고, 전면에는 조금 과장되고 왜곡된 인물 묘사를 내세웠다. 화면 안에서 사물들이 뒤엉켜 혼란을 주기보다, 오히려 탄탄한 구도와 묘사력 덕분에 보는 이에게 서글프면서도 굳건한 묵직한 인상을 제대로 심어준다. 이수억에게 서양의 입체주의는 단순한 미술 기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겪어낸 시대의 통증과 생존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단단한 언어였던 것이다.


5. 한국 큐비즘의 완성, 아류가 아닌 당당한 주인공들

피카소를 본 한국 미술은 단순히 그의 그림자만을 좇지 않았다.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전의 여정 끝에서 만난 한국의 거장들은 단순히 먼 유럽의 미술을 흉내 낸 모방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양의 시각 혁신을 빌려와 우리 고유의 자연을 담아냈고, 한국화의 유산 속에서 더 부드러운 평면을 찾아냈으며, 때로는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순간을 위로하는 단단한 형상으로 구현해 냈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의 수많은 걸작들 사이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방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의 진짜 삶과 정신이 당당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을 통해 한국 거장들이 완성한 묵직한 감동을 느꼈다면, 이 전시가 출발한 서양 미술의 거대한 줄기와 미술관 공간이 주는 매력도 함께 살펴보기를 권한다. 1편에서 이번 전시가 왜 '시각의 혁신'인지 그 이유를 짚어보고, 2편에서 거장들의 작품이 숨 쉬는 미술관 내부의 생생한 공간 디자인을 비평적으로 다루었다. 아래 3부작 가이드를 따라가면 이번 전시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 퐁피두센터 한화 《큐비스트》 전 제대로 보기
: 전시를 완벽하게 즐기는 3부작 가이드

 

👉 [1편] 왜 큐비스트들은 세상을 해체했을까
: 큐비즘의 탄생과 피카소와 브라크의 혁신

 

👉 [2편] 퐁피두센터 한화 현장 리뷰
: 건축과 공간 속에서 경험한 큐비즘

 

👉 [3편] 한국에 도착한 큐비즘(현재글)
: 김환기·유영국·박래현·이수억으로 이어진 한국적 변주